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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자 가이드 9 - 성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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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웹바이블 2020. 8. 31.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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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례(sacrament) 혹은 성레전이란 기독교에서 행하는 거룩한 예식을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거나 묘사, 상징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실제로 은총을 가져다주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가톨릭은 영세, 성찬, 견신례, 고해례, 안수례, 결혼례, 종유례 등 7성례를 집행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오직 세례와 성찬 등 두 성례만을 성례로 간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고(마 28:19; 막 16:15,16), 세례 요한을 통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친히 모범을 보이신 세례는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근원합니다. 세례는 일차적으로 진정으로 신앙고백을 한 성인에게 시행되어야 하나, 성도의 자녀들은 언약의 혜택에 참여하였므로 유아 때에도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행 16:31).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 유월절에 마지막으로 가지신 유월절 성찬(마 26:26-29; 막 14:22-25; 누가복음 22:26)에서 빵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리스도의 살을, 포도주는 그가 흘리신 피를 상징하며, 그것을 잊지 말고 기념하라고 명령하신 것(누가복음 22:19; 고전 11:24>.25)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속죄함을 입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 잊을 수 없는 은혜롭고 감격스러운 일이므로, 이를 상징하는 물질을 직접 먹고 마시면서 기념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는 예식입니다(고후 4:15). 

1) 성례 참예를 위한 준비 단계
① 학습 - 교회 출애굽기석한지 6개월 이상, 확실한 신앙과 교리에 대하여 신입교우부에서 배우고 자원에 의하여 학습 문답한 후 서약으로 학습을 서게 됩니다.
② 입교 - 부모의 신앙에 의하여 유아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 15세 이상 되어 자신의 신앙 고백과 결단으로 그 부모의 신앙 고백과 서약을 나의 것으로 확인하고 서약합니다.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은 사람 역시 문답과 서약만으로 입교인이 됩니다.
③ 세례 - 학습한 지 6개월에서 1년 된 후 자원하여 세례 받기를 원하는 때 세례교육부에서 세례 교육을 받고 문답한 후 서약하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④ 유아 세례 - 부모가 모두 또는 한 분이 무흠 세례 교인으로서 4세 미만 자녀의 세례를 받기 원할 때 부모가 문답한 후 서약하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⑤ 성찬 참예자 - 무흠 입교인 및 세례 교인은 모두 참예합니다.

2) 세례
세례예식은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기초이며, 성령 안에 사는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다른 단계들로 들어가는 길을 여는 문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교회와 한 몸을 이루어 그 사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세례는 물로써 말씀 안에 다시 태어나는 성사다." 

 (1) 이 예식은 어떻게 불리는가?

세례를 준다(baptizein)는 말은 '물에 담그다', '물에 잠기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물에 '잠김'은 예비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묻힘을 상징하는데, 그는 그 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사람'(고후 5:17)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 성사는 또한'성령의 쇄신과 재생의 목욕'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성사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남을 의미하고 실현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요 3:5). 
또 이 목욕은 조명이라고 불리는데, 이 의식을 받는 사람들은 마음에 빛을 받기 때문입니다. 세례로써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요 1:9>)이신 말씀을 받은 사람은 빛을 받고 나서"'빛의 자녀'(살전 5:5)가 되고, 그 자신이 "빛"(엡 5:8)이 됩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선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물, 은총, 기름 바름, 조명, 불멸의 옷, 재생의 목욕, 등 가장 귀중한 모든 명칭으로 부른다. 그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는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선물이며, 죄인들에게도 주어지기 때문에 은총이며, 죄가 물 속에 묻히기 때문에 세례(물에 잠김)이며, 신성하고 왕다운 것이기에 도유이며(기름부음받은 사람들은 신성하고 왕다운 사람들입니다), 눈부신 빛이기에 조명이며,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기에 옷이라고 하며, 씻어 주기 때문에 목욕이라고 합니다.

(2) 구약의 세례 예표

교회는 부활 성야의 전례 중에 세례수를 축복하면서, 세례의 신비를 예시한 구원 역사의 위대한 사건들을 장엄하게 기념합니다. 교회는 노아의 방주를 세례를 통한 구원의 예표라고 보았습니다. 과연 방주 덕분에 '몇몇 사람만이 물을 통과해서 구원을 받았는데 그 수효는 여덟 사람"뿐이었습니다. 홍수를 통하여 죄를 씻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세례를 미리 보여 주셨다.
샘물이 생명을 상징하는 반면 바닷물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바닷물은 십자가의 신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징 체계에 따라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참으로 해방된 것은 세례로 이루어지는 해방을 예고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홍해를 건너 바로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시어 세례 받은 새 백성의 예표로 삼으셨습니다. 요르단 강을 건너는 일에서 세례가 예표되었습니다. 요르단 강을 건넘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은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 되며,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된 땅을 선물로 받는다. 이 복된 상속의 약속은 새 계약 안에서 성취됩니다. 

(3) 그리스도의 세례

구약의 모든 예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성됩니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은 후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는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복음 28:19-20).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의로움을 이루시고자 죄인들을 위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자청하여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당신을 '비우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때 갓 창조된 물 위에 휘돌던 성령께서 새로운 창세기조의 전조로 그리스도 위에 내려오시고, 성부께서는 예수님을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마태복음 3:16-17)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파스카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위해 세례의 샘을 열어 주셨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당신께서 겪으실 수난을 받아야 할 "세례'(마태복음 10:38)라고 이미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요한 19:34)은 새로운 생명의 성사들인 세례와 성체성사의 전형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날'(요한 3:5)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 교회 안의 세례

성령 강림날 바로 그날부터 교회는 거룩한 세례를 거행하고 베풀어 왔다. 이를테면 성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에 감동받은 군중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사도행전 2:38). 사도들과 그들의 협력자들은 유대인이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권합니다. 세례는 항상 신앙을 전제한 것으로 드러난다. 바울은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네 집안이 다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하고 필립보의 간수에게 말했다.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믿는 이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다가 함께 부활합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로마서 6:3-4).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갈라디아서 3:27). 성령을 통하여, 세례는 깨끗하게 해주고, 거룩하게 해주고, 의롭게 해주는 목욕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물로 씻는 목욕으로서, 이를 통해 '불멸의 씨앗'인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는 효과를 낳는다.

(5) 세례예식은 어떻게 거행되는가?

가. 그리스도교 입문
사도 시대 이래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여러 단계의 입교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은 빠르거나 느릴 수는 있지만 몇 가지 필수적인 요소들, 예컨대 말씀의 선포, 회개를 수반하는 복음의 수용, 신앙의 고백, 세례, 성령을 받음, 영성체 등을 포함해야 합니다. 
이러한 입교 과정은 시대의 흐름과 상황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초기 교회의 입문은 오랜 교리교육 기간과 더불어 긴 과정을 거쳤습니다. 예비 기간은 준비 단계를 전례적으로 구분하는 일련의 예비 예식들을 거쳐, 마침내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거행함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나. 유아 세례
어린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전통입니다. 이것은 2세기부터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전도하기 시작한 때부터 온 '집안'이 세례를 받을 때4어린아이들에게도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어린아이들도 원죄로 타락하고 더러워진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므로, 어둠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의 영역으로 옮겨가기 위해, 세례로 새로 거듭나야 합니다. 구원의 은총이 완전히 무상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특히 어린이 세례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출생 후 가까운 시일에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다면, 교회와 부모는 그 아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무한한 은총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어린이 세례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생명을 양육하는 역할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의 신앙은 세례 후에도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세례를 위한 준비는 새 생활의 문턱까지 인도할 뿐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의 근원이며, 이 근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솟아 나온다. 

(6) 세례의 필요성

주님께서 친히 세례가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고, 복음을 전하고 모든 민족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세례는 복음을 전해 듣고 이 의식을 청할 수 있는 사람들의 구원에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을'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게' 하라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에 소홀함이 없도록 주의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모든 죄, 곧 원죄와 본죄, 모든 죄벌까지도 용서받는다. 세례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을 아무런 죄도 남아있지 않다. 곧 아담의 죄도, 본죄도, 죄의 가장 중대한 결과인 하나님과의 단절도 남아 있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례 받은 사람에게는 고통, 질병, 죽음 등 죄의 현세적 결과 그리고 죄로 기우는 경향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으로 남아있는 사욕은,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용감히 맞서는 사람들에게는 해를 끼칠 수 없다. '운동 선수가 월계관을 얻으려면 규칙대로 경기를 해야 합니다'(딤후 2:5).'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일원이 되게 합니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엡 4:25). 세례는 교회와 한 몸이 되게 합니다. 세례 대에서 국가와 문화, 인종과 성별 등, 모든 자연적, 인간적 한계를 초월하는, 신약의 유일한 하느님 백성이 탄생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전 12:13). 
세례 받은 사람들은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살아 있는 돌이 되고, 거룩한 사제'(벧전 2:5)가 되었다. 교회의 일원이 된 세례 받은 사람은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순종하고, 교회의 친교 안에서 그들에게 봉사하며,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며'(히 13:17)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세례는 성령께서'속량의 날'을 위하여 우리에게 찍어 놓으신 표지입니다.'과연 세례는 영원한 생명의 보증입니다.' 자신이 받은 세례가 요구하는 것에 충실한 신자는, '신앙의 표를 지니고', 세례 때에 고백한 그 신앙을 보존하고, 신앙의 완성을 바라면서 부활에 대한 희망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3) 성찬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 유월절에 제정하신 성찬(마 26:26-29; 막 14:22-25, 눅 22:26), 그리스도에게 참여함(요 6:53), 영적 양육과 성장, 성도의 연합(고전 10:17)을 상징하며,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과 구속에 필요한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특권의 은혜를 현실적으로 소유할 수 있게 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는 예식입니다(고후 4:15). 

① 세례는 일생 단 한 번으로 족하지만 성찬은 교회에서 행할 때마다 꼭 지켜야 하는 성례로서 하나님께서는 성찬을 통하여 우리에게 사죄와 함께 새 힘을 주십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구원을 위한 수난과 희생을 눈앞에 되새기며 우리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는 동시에 그 사죄의 은총을 몸으로 체휼하면서 장차 다시 오실 주님을 준비하는 것이 성찬의 근본 뜻입니다.
③ 성찬에 참예하는 마음과 정성 그리고 믿음이 중요합니다. 부끄러운 생활과 은밀한 죄를 회개하지 않고 성찬을 받는 것은 더욱 가증한 죄를 범하는 일이 됩니다(고전 11:27).

(1) 성만찬에 관한 학설
 
① 화체설(Transubstantiation, 化體說)  
화체설을 일컬어 트랜섭스탠쉬에이션(Transubstantiation)이라 하는데, 이것은 트랜스(Trans:변화) + 섭스탠쉬에이션(substantiation:본질, 본체)의 합성어입니다. 이것은 주의 만찬(혹은, 성만찬으로도 불림)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Rome Catholic Church)의 주장으로서 "주의 만찬을 행할 때, 성도들이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가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한다"는 주장입니다(라트란 공의회에서 결정함) . 

② 공재설(Consubstantiation, 共在說)  
공재설을 일컬어 컨섭스탠쉬에이션(Consubstantiation)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컨(Con: 공동, 함께, 같이) + 섭스탠쉬에이션(substantiation)의 합성어입니다. 이것은 루터교회에서 주장하는 학설입니다만, 정작 마틴 루터는 이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고, 그의 후예들이 명명한 것입니다. 그 의미는 "주의 만찬을 거행하는 순간에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빵과 포도주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는 학설입니다. 
  
③ 상징설(像徵說)  
상징설은 쯔빙글리가 주장한 주의 만찬에 관한 학설입니다. 그 의미는 "주의 만찬을 행할 때에 떡과 포도주는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가 만찬에 임재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일 뿐" 이라는 것입니다.  

④ 실재설(實在說)  
이것은 존 칼빈의 주장인데, "주의 만찬을 행할 때에 그리스도가 영적(靈的)으로 실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위의 학설들은 학자들마다 각기 주장하는 학설들이기 때문에 모두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개신교에서는 대체적으로 "상징설"을 따르는 추세입니다. 왜냐하면 성만찬은 우리를 위해 그의 살과 피를 내주신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행하는 예식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1:24). 

(2) 중세의 성만찬 의식

초기의 경우 『그레고리오 성사집』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평화의 입맞춤이 진행되었고, 초대 교회의 성만찬 예전과 거의 흡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8-11세기에 걸쳐 기독교 복음이 유럽 대륙의 프랑크족과 게르만 민족에게 전파됨으로서 예전은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 실시된 성만찬은 미사 속에 전락되어 버린 느낌이 들 정도로 형식화되기 시작했다. 제단이 생겨났고, 신자석과 사제석으로 구별되었고, 그리스도의 중보자의 성격이 상실되고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에 대한 공경심이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중세에 들면서부터는 신자들이 주일 미사에 참석하면서도 성만찬을 하지 않고 일 년에 한두 차례만 하게 되었다. 이런 습관은 19세기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중세의 성만찬은 초대 교회나 성경 전승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예전의 형식적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고, 그 속에서 참된 정신이란 고작 거룩한 예전에 참여했다는 것뿐이고, 그들 공동체에 대한 사랑의 나눔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결국 1545년 트렌트 공의회를 개최하여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뿌리 깊은 전통의 결과 오히려 의식은 중세기를 지나오는 동안 고정되고 말았습니다. 

(3) 종교 개혁 이후 성만찬 의식

종교개혁 당시에 서방교회의 타락상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예배가 설교 없는 피 없는 희생제사(미사)로 전락되었고, "그 역점도 떡과 포도주를 나눔에 있지 않고 그 물질의 성체화에 미신적인 요소까지 곁들일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구경꾼으로 전락한 신자들은 미사도 행사화 되어서 신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집례되는 등, 참된 성만찬 의식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특히 떡 대신 점차 돈으로 봉헌을 하거나 면죄부를 사도록 강요되어 개혁은 필연적인 사건이 된 것입니다. 
종교 개혁 이후 종교 개혁가들은 공통적으로 가톨릭 교회가 희생제사의 반복으로 드리는 미사와 성체화의 교리를 거부하면서 성경적인 예배로의 환원과 모국어 예배에 힘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와 영국 교회는 로마 가톨릭 예배의 많은 부분을 답습하였고, 쯔빙글리와 재세례파는 로마 가톨릭과의 완전한 단절을 꾀하였기 때문에 쯔빙글리는 오르간, 음악, 의복, 그림까지도 거부하였고, 재세례파는 공중 예배의 형식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종교 개혁 이후 모든 교파는 성만찬 예식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격감시켰고, 깊은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반 가톨릭 적에만 신경을 집중시켜 그다지 성만찬 의식이 발전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성만찬은 오늘 우리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 채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것입니다.

(4) 성만찬에 대한 오늘날의 의미

①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서의 성만찬 : 언제나 말씀과 성례를 포함하고 있는 성만찬은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고 기념하는 것이고 교회가 모든 피조물을 대신하여 드리는 찬양의 대제사입니다.  ②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서의 성만찬 :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와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그가 이루신 모든 일들과 함께 이 기념 속에 임재하며 우리와 친히 교제를 나누심과 동시에 이 기념의 의식을 통하여 활동하십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매일매일의 생활을 통해 우리 자신을 살아 있고도 거룩한 제사로 드리게 됩니다. 이 성만찬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화해의 종들이 되기 위하여 사랑으로 성화 되고 화해됩니다. 
③ 성령 초대로서의 성만찬 : 성령은 성만찬을 가능케 하시며 성찬식이 계속해서 유효하도록 만드시는 무한한 사랑의 힘이고, 성만찬의 모든 행위는 '성령 초대의 기원'의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성령은 새 계약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성화 되고 새로워지고, 모든 진리와 정의의 하나됨을 이루기 위하여, 세계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힘을 얻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만찬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합니다. 
④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만찬 : 교회의 삶을 양육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성만찬적 사귐은 동시에 교회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서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만찬은 삶의 모든 측면을 포함합니다. 즉 온 세상을 대신하여 감사와 봉헌을 드리는 대표적 행위로서 신자들을 세계사의 중심적 사건과 연결시켜 준다. 이러한 연대성은 기독교인 자신들이 그의 종 되심에 동참하는 행위로서 구속사건의 세계 내적 임재를 증거해 줍니다. 
⑤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 : 성만찬은 창조의 궁극적인 갱신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비전을 열어 주며 또 그 통치를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자들은 성만찬을 통해 화해되었고 또, 사람들 가운데서 화해의 종이 되도록, 또 부활의 기쁨에 대한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성만찬을 거행하는 자체가 교회가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다는 증거인데 이 참여는 복음선포, 이웃에 대한 봉사, 이 세계 안에서 성실하게 살아감과 같은 일상적인 형태를 취합니다. 성만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만들며,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유능한 증인이 되도록 하는 새로운 현실을 현 세대에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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